환상서가 본점

evilheat.egloos.com

포토로그




경계선 기타

아아- 아. 아아아.
조용한 평원. 들리는 것은 물 흐르는 소리. 그 외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. 그 세계는 어디일까.
아무것도 알 수 없고,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땅에서 소녀는 한참만에 눈을 떴다.

"넌 어떻게 여기를 왔어?"
"글쎄. 물어봐도."

정신을 차리자 그곳에 있었다. 그 말에 그녀는 끄덕였다. 뭔가를 알겠다는 듯이 혼자 납득하는 소녀. 새하얀 옷과 햇빛에 반짝이는 금발이 너무나 아름다운 소녀. 등 뒤의 날개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이내 다시 원래 누워있던 자리로 돌아갔다. 다른 말은 없는 걸까.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용히 강가로 다가갔다. 물고기는 없었다. 물 속에 사는 것은 없어보였다.

"여긴 어디지?"
"어디도 아냐."
"선문답을 하는 기분이군."
"진실이야."

그녀는 어느 새인가 앉아있었다. 소녀는 눈을 감고 그 자그마한 입을 살며시 열었다.

"낙원은 아냐. 저승도 아냐. 심연은 더더욱 아냐.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고, 연대기에도 존재하지 않아. 시대에는 없으며, 허구 속 땅도 아냐. 꿈 속 세계는 아니고, 그저 여긴 어디도 아냐."
"어디도 아닌 곳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."
"그러네."

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이건 선문답이었다. 그녀는 애매한 답만을 전했다. 생각을 하고 싶어도 깊은 생각은 할 수 없었다. 마치- 마치-

"그저 흘려보내."
"..."

그녀 말대로, 그저 흘려보내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. 생각은 흘러가고 말하는 것은 전해지지 않는. 아아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. 하나 확실한 건 이곳은 내가 발을 들일만한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.
아니 어디도 아니였지 여긴.

"흘려보내. 생각도, 존재도, 가치도."
"전부?"
"전부. 어디도 아니니까. 꿈은 잊고, 허구는 필요없어. 시대는 존재하지 않고, 연대기는 나올 수 없어. 역사가 없으니까. 심연이기엔 어두우며 저승이기에는 망자가 없고 낙원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."
"그래서 어디도 아니란 건가. 그렇지만 나와 너는 여기 있어."
"그것도 흘려보내."
"어떻게?"
"가만히- 여기 있으면 모든게 흘러가."

그 말에 거부감이 느껴졌다. 그 거부감은 자아가 낸 발악일까. 생각이 죽어가는 것이 조금씩 느껴진다. 자신마저 흘러보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- 몸은 발악한다. 그러나 정신은 이미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. 원하진 않았다. 그러나 흘러간다. 깊은 생각을 불가능케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-
누군가가 말을 걸게 만들었다.

"흐응. 그래. 역시 이대로 흘려보내지는 건 싫구나."

소녀의 표정이 바뀌었다. 아까까지 아무것도 없던 표정에는 기분나쁜 웃음이 그려졌고 그 자체에서 비릿한 거부감이 흘러나왔다. 그 존재감이- 너무 커졌다. 소녀는 존재감마저도 흘려보내고 있던 걸까.
도대체 뭐길래?

"저기말야. 그렇게 살고 싶어? 그 정도로 살아있는게 즐거워?"
"즐거울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는-"
"그렇지. 살아있다는 건 그렇지."

공기가 흔들린다. 그런 생각과 동시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. 무덤덤하게 걸어가는 사람들. 각자 할 일로 바쁜 사람들. 여긴 어디지? 처음 보는 곳이다. 저 거대한 것은 건물인가? 빠르게 돌아다니는 저것들은 무엇인가.

"즐거울 때는 언제지?"
"그건-"
"예를 들자면-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. 그렇지?"
"그거야 그렇겠지."
"그리고-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지."
"..."

이 소녀는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. 그것보다-
어느새 옷이 바뀌어있었다.

"괴로울때는? 다른 사람이 너를 괴롭게 할 때? 너를 고통스럽게 할 때? 재밌는 건- 그러면서 그 사람은 너를 괴롭히면서 즐거움을 느껴. 그건 어떻게 생각하지?"
"사람이 사는 세계는..."
"변명이지."

아- 이건.
이 소녀는, 아니 소년은, 아니, 이것은.
인지를 넘어섰다. 뭔지 알 수 없다. 다만- 불쾌감만이 쌓여간다. 거부감이 쌓이고 뱃속을 휘젓는 뱀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목젖을 건드리고 있었다.

"우우욱!"
"살기위해 다른 것을 희생시키지. 인간은. 아니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기본적인 진리. 다만 인간은 틀려. 이 세상 그 어디의 어떤 생물도- 자신보다 잘났단 이유로 증오하지 않아. 넌 지금도 나를 두려워하고 있어."
"크윽. 으..."

하얗게- 은빛으로 바뀐 머리카락. 날개는 사라진지 오래였다. 이건 누구일까.

"살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동물을 죽인다. 당연한 이야기지. 하지만 그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같은 종족을 공격하진 않아.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- 그 이유가 넘쳐나는 존재지."
"이유?"
"저 사람이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어-"
"!!"

머릿속이 강하게 후려맞은 듯한 고통으로 감싸였다. 손에는 칼을 눈앞에는 의자에 앉은채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. 아아- 이건 무슨 공포인가. 몸이 말을 따르지 않고- 그저 떨고있는 남자를 내려찍는다.

"그 자리는 내 자리였어."

툭 하고 손끝에 무엇인가가 닿았다. 경악으로 가득찬 표정이 나를 쳐다본다. 저 멀리 있는 끝없이 깊어보이는 바다속으로 사라져가며 마지막까지 그 눈동자에 나를 담는다.

"내가 원하는 걸 먼저 가져갔어."

어린애가 울고 있다. 어린애의 손에 들렸던 듯한 장난감은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었다.

"살아있다는 게- 참 기분 좋지?"

웃기지 말라고- 소리치고 싶었다. 어느새 풍경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. 다만- 어느새 내 양 발은 강물에 담겨져있었다. 천천히 몸을 휘감아오는 강물에 기겁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- 벗어날 수 없었다.
어째서? 고작 물일 뿐이잖아.

"그렇지만- 그런 사람만 사는 건 아니잖아. 정말로 착한 사람들도-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다!"
"그래. 그렇지. 그러니까 유지되는 거야."

강물이 거의 목까지 올라왔다. 그리고- 소년의 말에 망연히 그대로 강물로 끌려들어갈 뿐이었다.

"그런 사람들이 당하는 거거든.

아아- 천천히 흘러간다.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.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망각이 몸을 지배한 듯 천천히 물속에 잠겨들어간다.

"아아- 정말이지. 기분 나쁘네. 그렇지?"

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한 소년의 태도- 그러나 더 생각할 수는 없었다. 이미 강물을 따라서 저 멀리 흘러가고 있었으니까. 아아- 여기는 어디인가.
그렇지.
어디도 아니라고 했었지.

덧글

댓글 입력 영역